20대에는 ‘닥치고’ 했다. 30대인 지금은 '닥치면’ 한다. 한글자 차이지만 삶의 모습은 극명하게 갈린다. 두눈 질끈 감고 “약진 앞으로!” 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다. 하기 싫어서 안한다. 닥치고 하던 시절엔 어려움이 많았다.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닥치면 하는 지금은 도무지 어려움이 없다. 그래도 안한다. 의지는 선명한데 몸과 마음이 따로다.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겠다며 대학에 갔다. 전공수업은 수학의정석 만큼이나 무용했다. 캠퍼스 내에선 세상을 배울 수 없었다. 그래도 닥치고 했다. 하라니까 했다. 왜 하는지 몰라도, 재미없어도 닥치고 했다. 그런다고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했다. 누가 시키는대로 하고 남들 하는대로 했다. 어쨌든 정말 열심히 했다.
닥치고 하다보니 길이 몇개 나타났다. 명확한 기준 없이 그 중 한 길을 선택했다. 닥치고 하는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가서 몇년을 또 닥치고 했다. 그렇게 20대가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참 생각없이 편하게 살았다. 별로 후회스럽지도 않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것보다 열심히 살 자신은 없다. 그렇게 걸어온 길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하릴없이 이런 생각을 적는 이유는 출근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다. 왜 일찍 출근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일찍 나갈 때가 있다. 출근을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대선 때 새벽기차를 타라고 하면 또 잘 탔다. 머리가 커서 닥치고 하진 않지만 닥치면 또 한다. 주어진 환경을 극복할 생각은 않고 주어진 만큼만 한다. 약진하던 삶에서 수동적인 삶이 됐다.
요 며칠 생각한 결과 닥치면 한다는게 문제다. 어쨌든 하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안든다. 시키는대로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일종의 무기력함인데 그러다보니 일과도 점점 재미없어졌다. 일상이 힘들어서 그렇다는 말도 전부 기만이다. 매일 아침 영어단어 외우고 매일 밤늦게 자습하던 시절보다 힘든 것 하나 없다.
닥치고 했을 땐 의미를 찾을 수 없었지만 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지금은 아무 길도 보이지 않는다. 남들 따라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인터넷으로 컵과 그릇을 실컷 구경했다. 커피용품도 구경했고 관련 글도 찾아 읽었다. 이런 시간을 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알고있는 것만 가지고 살았다. 그래도 살아지니까. 나이들수록 멋지게 잘 살아야 하는데 어째 지나온 날들이 더 멋진 것 같다.
20대 중반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시절 자전거를 깨나 탔다. 눈오는 날만 빼고 추워도 더워도 비가와도 탔다. 앞뒤 기어도 없고 브레이크도 하나밖에 없는 fixed gear였는데 처지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나와 비슷했다. 자물쇠를 채워놓지 않아도 아무도 안가져갔다. 그 자전거를 그래도 몇년 탔다. 서울에 있는 큰길은 그때 거의 다 가봤다. 지금도 서울 지도를 펼쳐놓으면 그때 생각이 난다.
작은 원룸에서 자전거와 함께 잤다. 6평 남짓 작은 방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자전거를 조립했고 수리했다. 펑크난 바퀴를 갈아 끼우고 기름칠을 했다. 샵에 가서 고칠 돈이 없어 침대에 앉아 자전거를 분해했다. 행복했다. 그 자전거와 함께라면 서울 어디라도. 전국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튼튼한 두 다리가 있었고 젊은 혈기가 있었다.
그 시절 밤마다 자전거로 서울 도심을 누비게 했던 원동력은 억눌린 스트레스였다. 취준생이라는 신분이 참 힘들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작은 방 안에 스스로를 집어쳐넣고 책만 읽었다. 기자 시험이라는 게 또 몇개 틀리고 몇개 맞추고 하는 시험도 아니라서 목표를 설정하기도 어려웠다. 유일한 목표는 합격이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잠은 죽어서 실컷 자겠다며 놀던 내게 취준은 지옥길이었다.
후진 자전거의 페달을 허벅지가 터질 때까지 밟으면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청계천을 출발해 중랑천을 지나 한강을 달려 반포대교까지 가서 쉬는 코스를 제일 좋아했다.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끌고 집에 와서 누우면 살아있다는게 느껴졌다.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가난한 취준생에겐 최고의 순간이었다.
입사 후에는 자전거를 거의 타지 못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술을 많이 마셨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 자전거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가끔 동네 마실용으로 타고 나갔다. 가고싶은 곳은 잔뜩 적어놨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계속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로는 단한번도 타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 새 자전거를 샀다. 훨씬 더 비싸고 좋은 자전거였다. 브레이크와 기어 연결법을 까먹어 동네 자전거샵에 가서 돈주고 조립했다. 그 작은 원룸방에서 분해·결합을 반복하며 몸으로 익힌 기술들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조립을 마치고 휴대폰 지도를 열어보니 어느 정도 가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반포대교를 찍었다.
자전거는 이전만큼 시원시원하게 나아가질 못했다. 그동안 운동을 안해서 체력이 약해졌나 생각했다.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아니면 시쳇말로 사회생활에 지쳐서 그런걸까. 종합적인 이유겠지만 결국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작아져서 그렇지 않을까 한다. 더이상 자전거를 타고 달려야할 이유가 없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인 지금까지 상실의 시대였다. 욕심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애인을 잃었고 가지고 있던 꿈을 잃었고 체력을 잃었고 근육을 잃었고 열정을 잃었고 성실함을 잃었다. 자랑거리를 잃었고 경험을 잃었다. 많이 잃어버린 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바꼈고 감정소모에 피곤함을 느꼈다. 자전거가 크고 무거워지는 동안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잃었다. 젊은 날의 슬픈 자화상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로서 환경에 순응한다. 좋은 환경도 어려운 환경도 마찬가지다. 내가 처한 상황이 열심히 노력해서라고, 혹은 노력을 안해서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개천용, 자수성가 이야기가 삶의 전부는 아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몇년전 성북동에서 이태원동으로 이사했다.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방이 두개나 되는 집같은 집이었다. 전 임차인이 나간 뒤 도배를 새로해서 깔끔한 상태였다. 그때도 공간에 대한 욕심이 컸던 나는 기대에 부풀어 열심히 청소했다. 책장, 옷장 등 가구도 새로 들였다.
한동안 새집같았다. 집들이도 했다. 그러다 그해 여름 역대급 폭염이 찾아왔다. 뉴스에선 연일 최고 기온을 갱신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보니 침대 밑에 개미떼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연구 결과 더위에 호르몬 이상이 생긴 개미들이 땅 위로 기어나온 것이었다.
두달간 돌돌이 테이프로 개미를 2만마리 정도 학살했다. 대한민국에 있는 개미약은 다 써봤다. 그래도 잡히지 않아 결국 미국에서 직구한 여왕개미 잡는 약을 살포했다. 그렇게 개미떼를 박멸했고 그 다음해 한달동안 이어지는 장마가 찾아왔다.
장마가 계속되는 가운데 해외여행으로 열흘간 집을 비웠다. 아무 걱정없이 놀고 돌아와보니 온 집안이 곰팡이로 뒤덮였다. 바닥부터 벽면까지, 모든 집기 위에 곰팡이가 내려앉았다. 몇달동안 곰팡이와 사투를 벌였다. 곰팡이 성질에 대해 공부했고 열심히 닦았다. 그렇게 곰팡이와의 사투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다음해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누수는 치명적이었다. 밤새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상하게도 2층은 누수가 없는데 1층에만 물이 샜다. 옆집은 비만 오면 폭포가 흘렀다. 누수 탐지 요원들이 몇번 왔다갔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애꿎은 검사비만 집주인들 주머니에서 나갔다.
2층 집주인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집벽을 뜯어서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입장이었다. 1층 거주자들이 법적대응을 하고나서야 집문을 열어줬다. 원인을 찾았고 수리에 들어갔다. 한달을 천장이 뜯긴채 살았다. 어두컴컴한 집안 뜯겨나간 천장 속 벽돌과 부서진 나무들이 참 차가웠다.
집 관리를 포기했던건 곰팡이 습격 때부터였던 것 같다. 원상복구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잘 관리하고 싶었는데 거듭된 고난에 무너졌다. “너는 그때 왜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니"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상대가 어떤 환경을 겪었는지 모른채 노력의 정도를 거론하는 것만큼 오만한 모습이 없다.
‘다 의지의 문제'라고 충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높은 기상과 강인한 의지만을로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긴 어렵다. 냉혹한 현실을 극복하고 크든 작든 무언가를 이뤄낸 이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성취라도 말이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신 역할을 맡은 모건 프리먼은 기적을 바라는 주인공 짐 캐리에게 "직업이 두개인 미혼모가 아이들을 축구연습장에 데려다 주는게, 청소년이 마약을 멀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게 기적"이라고 말한다. 일상속 매일같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우리 모두 기적이다.
이태원동을 떠나 상암동으로 이사오던 날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자부하던 나는 얼마나 많이 무너졌으며 그동안 타인의 무너짐에 얼마나 냉혹했는지를 되새겼다. 늘 삼가고 삼가야겠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참견하며 실수하지 말고 내 삶 속 기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기억만 변했다. 지금 가장 소중한 물건을 하나만 꼽으라면 매번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 필름카메라를 선택하겠다. 수년간 기억을 이 카메라에 담아 숙성시켰고 현상하고 인화했다. 지나가서 흐려진 기억을 되살렸고 생생한 순간은 가둬놓고 묵혔다. 필름에는 언제나 지나간 계절이 담겨 있었다.
어느 여름 창경궁 비원에서 문화해설을 들은 적 있었다. 해설사는 우리를 이끌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비원은 아름다웠고 국가적으로 숨겨둘만 했다. 해설사에게 들었던 설명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이 말만은 기억했다. “비원에 다시 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겨울의 비원이 어떨지 상상만 해 주세요” 그해 겨울 나는 비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기억을 쉽게 왜곡한다. 추악한 내면의 저 끝에 대한 기억도 낭만과 한낱 실수로 포장한다. 그렇게 양심과 선한 마음은 무뎌지고 눈치없는 ‘아재'가 되어간다. 왜곡시킨 기억을 가지고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쉽게 말한다. “나땐 더 힘들었어” “힘들겠지만 그건 힘든 일도 아니야” 왜곡된 기억이 만든 흉악함이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수년전 한파 속에 필름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가 그대로 먹통이 됐다. 도무지 원인을 몰라 세운상가 수리점을 찾았다. 고칠 수 없다고 했다. 그 카메라는 분해해서 공부한뒤 버렸다. 최근 또다시 오래쓴 카메라 셔터에 문제가 생겼다. 사망선고를 받을까 두려워 수리를 망설이다 결국 다시 세운상가를 찾았다.
열심히 검색해서 제일 잘하는 곳으로 갔는데 지난번 그곳이었다. 내 카메라에 사망선고를 내렸던 수리공은 변함없이 카메라를 고쳐내고 있었다. 용기를 내 수리를 맡겼고 며칠 뒤 수리를 완료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카메라를 찾는 길에 요새는 필름을 주로 어디서 사냐고 물었다. 수리공은 작은 명함을 건넸다. 명함 속 주소를 찾아가보니 10년전 가난한 학생이었던 내가 필름을 싸게 샀던 구멍가게였다.
옛 생각을 하다가 추억이 서린 장소를 찾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똑같은 장소에 가서 똑같은 음악을 듣고 똑같은 길을 걷는다. 사람과 장소와 환대는 언제나 그대로다. 거기 현존하는 내 모습만 변했을 뿐이다. 사유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다. 잘못한 기억을 단순히 실수한 기억으로 치부하지 않기 위해서, 잘했던 기억도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왜곡하기 위해서다. 훌륭한 사람이 되자.
금오름의 일몰은 아름다웠다. 왜 그런 적이 종종 있다. 별 기대 안하고 오른 산에서 본 풍경이 참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가 있다.
정말 조급했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욕심 때문이었는데 앞서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모임에서 사진을 찍으러 나가면 가장 멋진 사진을 찍고 싶었고 레이소다에 사진을 올릴땐 무조건 메인에 가고 싶었다.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고 행복했다가 불행했다.
서른줄에 접어드니 조급함이 조금은 사라졌다. 뭘 흘리고 다니지도 않고 까먹는 것 없이 척척 잘 기억한다. 행동은 침착해졌고 생각은 신중해졌다. 성격은 여전히 급하지만 더이상 챙겨야 할 것들을 잊지 않는다. 어렸을 때 보던 어른의 모습이다.
조급함이 사라진 자리엔 태만이 자리잡았다. 이 태만이 ‘이제 와서 해봐야 뭐하겠어'라는 생각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냥, 아무것도 안한다. 조급하게 하지 말랬더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코로나19까지 겹쳐 위축된 상황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자유를 갈망했었다. 직업을 가져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주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멋진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 줄 알았다. 혼자 산지 10년이 넘었고 직업도, 돈도, 시간도, 체력도 있지만 바라던대로 살기가 참 힘들다.
집에 혼자 있을때 세바시를 자주 본다. 거칠게 또는 특별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내 인생을 15분동안 얘기할 수 있을지다. 30대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거만해 보일 수 있지만 이대로라면 4050에도 달라진 점이 없을 것 같다.
수년간 써온 일기에도 SNS에도 이런 취지의 글을 얼마나 써올렸는지 모르겠다. 2022년도 벌써 한달이 넘게 지나갔다. 걱정하던 이사도 잘 끝마쳤고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던 정치부에서도 1년을 버텼다. 이제는 그만 후회하고 나가서 바라던 삶을 살 때다. 이 페이지가 더많은 젊은 날의 초상으로 가득찼으면 좋겠다.
불안함을 잊은 한 해였다. 2021년 2월 정치부 발령 이후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 평소 가장 관심없는 분야를 꼽으라면 정치와 경제라고 했다. 정작 도움이 되는 분야는 공부하지 않았고 단순한 선악 구도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그게 참 쉬웠으니까. 인류 공동의 가치에 비추어 선한 것은 선한 것이었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었다. 정치부에 온 뒤에도 선악 구도를 깨기까지 오래 걸렸다. 어떤 현상에서 잘잘못을 따지고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 결론을 내리다 많이 혼났다. 다양한 입장 중 최선을 가려내는 과정. 정당팀 말진으로서 할일은 선배들이 그 과정을 무탈하게 지날 수 있도록 발생과 발언들을 챙기는 일이었다. 11개월을 하니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 하지만 지금도 불미스런 일을 보거나 들으면 “그런 나쁜 놈들이 다 있어?"라고 하는걸 보면 아직도 멀었다.
진심으로 나이를 잊고 지냈다. 새해를 맞아 한번 세보고 깜짝 놀랐다. 서른을 넘길 적에도 담담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이가 될 줄이야. 나이가 들면 들수록 20대의 기억이 명료해진다. 풍차를 향해 진격하는 돈키호테처럼 살았다. 허무맹랑한 꿈을 꿨다. 한살, 두살 먹어갈수록 조급해졌다. 20대 내내 마음은 불안했다. 불안은 수상한 연기 같았다. 힘껏 들이마셔도 어디에 해로운지 몰랐다. 목표 자체가 허상이었기에 불안 또한 가짜였다. 그래서 즐거웠다. 이게 청춘이라고. 내 남은 날은 여전히 푸르다며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렸다. 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았고 불안을 이야기하기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무리 손아귀에 힘을 주어도 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불안과 걱정으로 보낸 지난 날들이 내게 남겨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른줄에 들어선 이후 눈앞에 풍차는 없었다. 보이는 것은 적 뿐이었다. 내 인생, 직업, 인간관계에 도움이 되는 것들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순수하게 정말 하고싶어 하는 일은 사라졌고 할 일과 해야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신경쓰지 않았던 현실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지난 날들에 대한 후회도 조금 생겼다. 서른줄에 느끼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가슴을 설레게 하던 새로운 도전은 인생에 도움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루에 커피를 6잔 마시는 행위는 낭만이 아닌 낭비와 중독으로 치부됐다. 연기 속에서 빠져나와 본 세상은 엄혹했고 지난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눈앞에 놓인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했고 여유있게 쉬면 안됐다. 성실하게 적들을 쓰러뜨렸고 처참하게 적들에게 쓰러졌다.
얼마 뒤 이태원을 떠난다. 이번 이사는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것 같다. 20대 중반 요식업의 트렌드를 배우겠다며 이태원, 한남, 홍대, 상수, 합정, 신촌, 압구정, 청담을 누볐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썼다. 돈과 시간이라도 아껴보자며 이태원으로 이사한 뒤 얼마간은 참 뺀질나게 돌아다녔다. 연기 속에서 허우적댔다. 돌이켜보면 참 행복했던 시간이었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들 앞에서 자신있게 늘어놓을 수 있는 시간들이다. 세상의 적들과 싸우기 시작한 뒤로는 하는 이야기들이 재미없어졌다. 맛집 좀 알려달라는 말에 30분은 떠들던 내가 이제는 "요즘 맛집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럼 내가 아는 건 뭔가. 성인이 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남들 앞에 나서 떠들 말이 없다. 2021년 하반기 꾸준히 나를 괴롭혔던 질문이다. ‘무얼 하며 살아갈까'가 아닌 '뭐 하면서 살았나'다.
2022년에는 다시 연기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허황된, 불가능한, 이유를 모르는 도전을 해보고 싶다. 외국어 공부도 다시 시작해보고 싶고 운동도 다시 열심히 하고 싶다. 자격증 공부도 집중해서 해보고 싶고 등산과 캠핑, 여행도 올해보다 더 많이 다녀보고 싶다. '할 것이다'가 아닌 '하고 싶다'고 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이 처연하다. 20대에 내 입에 붙어있던 '할거야'라는 어미를 되찾아 보려고 한다. 2022년에는 세상의 적들과 씨름하며 살지만은 않을거야. 몸과 마음을 단단히 챙겨 건강하게 살거야. 작은 것에 집중하다 큰 것을 놓치지 않을거야.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거야.
성공한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종현은 2017년 12월18일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고 많은 돈을 벌었으며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는 사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수많은 팬들이 그를 사랑했지만 종현은 우울증이라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6년 모 언론사 인턴 시절 종현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종현의 첫 정규앨범 발매 쇼케이스 자리였는데 강남의 한 스튜디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빨간색 정장에 핑크색 머리를 한 종현은 시종일관 스튜디오를 오르내리며 노래를 불렀다. 대개 아이돌 그룹처럼 철저히 반복숙달된 완벽한 퍼포먼스가 아닌 자유롭게 자신의 성과물을 드러내는 듯 했다. 쇼케이스 뒤 이어진 라운딩 인터뷰에서도 종현은 예상 외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자신감에 차 있었고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있는 표정이었다.
종현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여느 아이돌과 달라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의 사망 소식을 뉴스로 접했을 때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참 행복해 보였던 그가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취업한지 만1년을 가까스로 넘긴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토록 바랐던 사회적 성공. 그걸 이룬 줄 알았던 종현이라는 사람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던 사람이 마음의 병으로 세상을 떴다니 믿기지 않았다.
종현의 죽음 뒤로 지금까지 늘 행복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컨데 우리는 항상 가지지 못한 것들로부터 행복을 구하려 한다. 저 옷만 산다면, 저 자동차만 가질 수 있다면, 건물 한 채만 가지고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그것만 가지면 삶이 더 나아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 가진 것 같았던 종현의 죽음에서 충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돌이켜 보면 큰 행복은 가지지 못한 것들 사이에 없었다. 새 옷을 사거나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서 느끼는 행복은 일시적이었다. 그에 비해 오랫동안 공부한 외국어로 외국인과 대화에 성공했던 순간이나 정말 마음에 드는 글을 썼을 때, 학창시절 반 친구들과 방과 후 농구를 하던 기억은 지금까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틸틸과 미틸이 행복의 파랑새를 집에서 찾은 것처럼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성공한 줄 알았던 종현은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외로웠을까. 자신을 사랑해주던 팬들을 뒤로 하고 이 세상을 뜨기 전 종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끝에서 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나는 이 세상을 뜨기 전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까.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려 발버둥치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평소 종현의 노래에는 위로하는 가사가 많았다. 그가 떠난 뒤에야 팬들은 그 위로가 자신에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손을 뻗어줘. 내 목을 감싸줘. 좀 더 아래 내 어깰 주물러 줘. 지쳐버린 하루 끝 이미 해가 떴어도 난 이제야 눈을 감으니. (중략) 너의 그 작은 어깨가 너의 그 작은 두 손이 지친 내 하루 끝 포근한 이불이 되고.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네게도 내 어깨가 뭉툭한 나의 두 손이 지친 너의 하루 끝 포근한 위로가 되기를. 자연스레 너와 숨을 맞추고파. [하루의 끝 中]
블루보틀 제주점은 2021년 7월30일에 문을 열었다. 전혀 몰랐다. 여름휴가와 겨울휴가를 모두 제주도에서 보내게 됐는데 올 때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새 출입처에 적응만 11개월째라 즐겨하던 일들을 못하게 된 점이 참 안타깝다. 몇년전부터 휴가를 내서 스스로를 일로부터 일부러 격리시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라도 기억나서 다행이다. 그 기억들마저 잃어버린다면 내 20대는 통째로 날아간다.
건축인테리어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된 것은 아마 10년도 더 전 어느날 연남동 연남살롱을 찾았을 때일 것이다. 주인의 취향으로 꽉 찬 그 작은 가게 안에서 슬램덩크를 읽으며 나중에 꼭 이런 공간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블루보틀 제주점은 근래 마주한 공간 중 가장 멋지다. 주변 풍광을 침범하지 않는 낮은 건물에 돌담으로 안과 밖을 구분. 돌담은 성인이 일어서서 안쪽을 내다볼 수 있는 정도의 높이. 제주 전통식이다. 한국인은 성격이 급해 핸드드립을 기다리지 못할 것이라며 입점을 꺼리던 블루보틀이 한국 진출 약 2년만에 이런 멋진 공간을 만들어냈다.
추석 명절 찾은 서점에선 휴식을 권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참고 노력하라더니 이제는 멍청하게 왜그렇게 사냐고 꾸짖는다. 책들은 질세라 잘쉬는 법을 소개한다. 잘노는 법. 잘먹는 법. 그정도 했으면 됐다고. 정말 고생했다고. 삶이란 그렇게 달리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배웠다는 양반들이 제법 엄중하게 타이른다.
열심이 미덕인 시대에 자란 청년의 기억이다. 추석 명절에 농협 하나로마트에도 갔다. 10년 전 법성포 굴비를 떼다가 팔던 곳이었다. 정식 수산물 매장도 아닌 작은 코너 매장에서 원래 일하던 동네 형과 굴비를 떼다 팔았다. 나는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냉동창고를 오가며 굴비박스를 날랐고 형은 그 굴비를 매대에 올려 선물 포장했다. 나는 “굴비 보고가세요"를 외쳤고 여사님들은 "잘한다"고 했다.
10년 전 그곳에서 그야말로 쉼없이 일했다. 형은 굴비를 많이 팔아 외제차를 사겠다고 했다. 굴비를 파는 기간동안 동네 형이 점심먹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동네 형은 손님을 한명이라도 놓치면 안된다고 했다. 첫출근날 점심시간 1시간을 다쓰고 왔다고 혼났다. 동네 형은 "누가 밥을 1시간이나 먹냐"고 했다. 돈 버는 일은 학교다니며 공부하는 일과 차원이 다르다는걸 그때 배웠다.
어린 시절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는 레슨수첩이 있었다. 선생님이 레슨수첩에 동그라미 30개를 그려주면 작은 연습실 방 안에 들어가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30번 쳐야 했다. 한번 완곡할 때마다 동그라미 한개를 지웠다. 수없이 든 고민은 거짓말로 동그라미 몇개를 지울까였다. 한번도 그래본 적은 없다. 29번 친 것과 30번 친 것이 다르다는 것을 내 자신이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덜 쉬고 연습하는게 집에 빨리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피아노를 연습했던 작은 방은 외로웠다. 하얀 방음벽 위에는 연습에 지친 원생들의 낙서가 가득했고 나도 그 위에 내 이름을 남겼었다. 누구도 대신 연습해주지 않았고 나와 동그라미만 그 작은 방 안에 남아 결투했다. 100번 연습한 사람을 101번 연습한 사람이 이긴다고 세뇌당했다. 그러니 열심히 하라고. 내가 쉴때 누군가는 연습한다는 말을 쉴새없이 들었다.
얼마전 제주도에서 반팔 와이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은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아빠들이었는데 가족들 중 아빠만 그렇게 입은 집이 꽤 많았다. 줄서서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니 옷이 그런 류(類) 밖에 없다고 했다. 평생 산 옷이라곤 출근할 때 입는 옷 뿐이란 얘기다. 누가 이 가장들에게 왜 그렇게 쉼없이 사냐고 일갈할 수 있을까.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서점의 책들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충고하다가 이제 됐다며 잠시 쉬어가라고 기만하는 동안 사회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한걸음씩 나아간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잘하고 싶어서 잠을 못잤다"고. 다니는 미용실의 젊은 남자 미용사는 사장에게 "쉬는 날에도 나와서 일하고 싶다"했다.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더많이 일해야 한다고. 우리 모두 잘못 산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빅토르 위고도 열심히 살다가 삶의 끝자락에서야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시류에 편승해 노오오오력해라, 쉬어라 가볍게 말하는 자들보다 자기 할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주변에 더 많아서 다행이다. 쉬는 날에도 잘 못쉬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워 기록을 남긴다.
유명한 학자가 말했다. 늙어서 가장 서러운 때는 내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라고. 아무리 신체 건강하고 인지능력이 멀쩡해도 서서히 잊혀져가며 세상에서 더이상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게 너무 두렵다고 한다. 촛불집회에 나온 수많은 조직화된 개인들과 태극기집회에 나오는 개별주체들은 다르다. 전자가 친구와 이웃과 한마음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이들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리려는, 잊지 말아달라는 개별자들의 처절한 부르짖음이다.
얼마 전 아빠가 새차를 사셨다. 우리 가족이 새차를 산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언제나 중고차, 새차같은 중고차를 샀던 우리 가족으로선 아빠가 새차를 사신 게 놀라웠다. 그동안 차에 욕심을 부리지 않으시던 아빠는 이번 새차를 풀옵션으로 사셨다. 새차를 타고 전국을 돌며 차박을 하겠다고 하셨다.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으신 아빠는 요즘들어 하고싶으신 일이 많으시다. 자식들 키우느라 그동안 하고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 늦었지만 그중에서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시려는 것처럼 보인다.
학자의 말을 듣고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스스로를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로 여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당신들이 아직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필요한 존재인지를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다. 내가 아직 엄마, 아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기도록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고안했다. 그중에 하나가 아는 것도 묻기다. 등기부등본 떼는 법, 전입신고 하는 법, 김치찌개 만드는 법, 퇴직연금 가입하는 법 등 이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엄마, 아빠에게 물어보고 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성심성의껏 걱정하는 마음으로 도와주신다.
고향에 내려가 아빠와 대화를 할때면 시사주제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아직 아빠가 알고 계신게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다고 이야기한다. 매 대화 때마다 아빠가 기억하는, 경험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묻고 배운다. 아직도 아빠에게 배울 게 많으니까. 엄마와는 매번 쇼핑을 간다. 집안 장롱속 엄마가 아가씨 때 입었던 스타일의 옷들을 보러 다닌다. 결혼하고 옷 한벌 제대로 사입지 못하신 우리 엄마에게는 아직 예쁜 옷을 입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엄마와 아빠는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 절대로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니까.
지난 주말 바쁘다는 아빠를 억지로 끌고 캠핑을 갔다. 새차를 사신 아빠는 차박, 차박 하시면서도 아직 한번도 떠나지 못하고 계셨다. 사실 아빠는 차박만 아시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계신다. 그런 아빠를 위해 차박용 자충매트를 알아보고 캠핑지를 예약했다. 아빠는 바쁘다고 하시면서도 미리 사둔 캠핑의자와 테이블박스 등을 챙겨 신나게 캠핑지로 오셨다. 밤에 어묵탕을 끓이며 그런 이야길 했다. 엄마, 아빠가 어린 나에게 세상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당신들께 세상을 보여드리겠다고. 생각만 하고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기꺼이 같이 하겠노라고. 그러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하자고 말했다.
휴일을 맞아 평소에 가고싶었던 카페를 찾았다. 인터넷으로 미리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방문했지만 아직 준비중이었다. 사장은 늦잠을 자서 오픈이 늦어졌다고 했다. 별 수 없이 옆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자영업을 하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다가 아까 그 카페가 문을 열었을까 궁금해졌다. 다시 가보니 마침 빈자리가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있는데 사장이 마카롱을 함께 가지고 왔다. 아까 그냥 돌아가신 게 생각나 사과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사장은 죄송하고 고맙다고 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있다가 마카롱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히 내가 피해를 입어 사과를 받은 것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사장 입장에서는 사과를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곧바로 사과했고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사과였지만 친절로 느껴졌고 카페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졌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표현들에는 때가 없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이 표현들이 그렇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으면서 저 세 표현을 할까 말까 고민을 참 많이 했다. 이걸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이정도로는 기분이 괜찮지 않을까. 언제 어떻게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어느 정도로 고맙다고 해야 할까. 굳이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않을까. 정말 쉬운 기본적인 감정 표현이지만 입밖으로 꺼내기 가장 어려운 표현들이었다.
내게 무한대에 가까운 사랑을 주시던 외할머니가 인지능력을 잃어간다. 엄마에게 대략적인 상황은 전해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심각했다. 오랫만에 마주한 외할머니는 앞에 놓인 쇼핑백이 뭔지 10초에 한번씩 물어보셨다. 지갑 속에 있던 돈은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다. 우리가 사간 음식을 드시면서도 계속 이 음식은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정말 펑펑 울뻔했다. 지갑 속에 있는 돈을 전부 꺼내 할머니 지갑에 넣어드리고 절대 잊어버리지 마시라고 했다. 손자가 준 7만원 꼭 기억하시라고. 외할머니는 다행히 우리가 떠날 때까지 7만원을 기억하셨다.
외할머니는 내게 각별하다. 어린 시절 생일 때마다 오셔서 수박을 모양내 잘라주시고 잡채며 불고기며 온갖 음식 장만을 도와주셨다. 엄마가 외출하셨을 때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놀아주셨고 명절에는 항상 따듯한 밥에 맛있는 반찬을 준비해 두셨다. 그런 외할머니 댁을 떠나기 싫어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그렇게 떼를 썼다. 나중에 돈을 벌면 꼭 외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었다. 외할머니께서 내게 주신 대가 없는 사랑처럼 나도 꼭 그렇게 사랑해 드리겠다고 말이다.
마음만 그렇게 먹었지 외할머니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나는 단한번도 그 사랑을 돌려드리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준비하고 직장에 적응하는 동안 외할머니는 서서히 늙어 가셨고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수습기자 시절 외할머니는 원인 모를 불치의 병에 걸리셨다. 수습을 마치고 병원 앞 본죽에서 전복죽을 사 병문안을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도 외할머니의 병세는 점점 악화돼 간다. 나는 사랑해요, 고마워요, 라는 말을 이유없이 미루다가 미안해요, 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졌다.
외할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왜 나는 밥벌이를 늦게해 외할머니께 받은 사랑을 더 빨리 돌려드리지 못했는지. 아니, 그보다 왜 외할머니가 지금보다 더 멀쩡하셨을 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는지 후회했다. 지금 바로가 아니라면 언제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는지. 멍청하게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뒤늦게 후회하며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봤자 이전만큼은 못할 게 분명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미루다가 이제는 외할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진 않을까 걱정하게 됐다. 게으르고 무심한 손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다. 이제라도 여기에라도 적어본다. 할머니 사랑해요.
나에게 경제는 불모지다. 호기롭게 들었던 경제학 원론 수업에선 C+를 맞았고 자격증 공부를 해보려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과목 자체가 사라졌다. 지금까지도 경제 용어나 해설을 들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런 나에게 경제를 이해시켜 준 건 ‘경제는 사랑을 금지한다'는 문장이었다.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말이 있을까. 가난을 바라보는 척도는 다 다르겠지만 가장 가난하다고 느낄 때는 하고싶은 일을 경제적인 이유로 하지 못할 때일 것이다. 그게 사랑이라면 지독하다.
취업 시즌이 다가오자 부모님은 이런저런 학원에 다니는게 어떻냐고 하셨다. 제안을 거부했는데 불합격 할까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아끼고 또 아껴 보태주는 학원비일텐데 불합격했을 때 느낄 미안함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나란들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랴. 경제는 나에게 또다른 미래를 금지했다.
지방의 한 작은 시골교회에서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어느날 아이들이 너무 순하고 착해보여 먹고싶은 것을 말하면 사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비싼걸 말해도 무조건 사주겠다고 했는데 아이들이 말한 것은 자장면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는 그 아이들이 먹어본 가장 비싼 음식이 자장면이었다는 것이다.
기자가 되고 싶다고 느낀건 그때였다. 세상의 소식을 전하고 쉽고 재미있고 빠르게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작은 시골 마을 아이들이 자장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세상에 많다는걸 알게 해주고 싶었다. 돈많고 힘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놈의 경제라는 벽을 조금은 이겨내고 싶었다.
삼시세끼를 챙겨먹을 때와 밤에 자려고 누웠을때 항상 경제가 금지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헌책방에서 사온 문제집에 적힌 정답을 밤새 지우개로 지우던 어머니의 모습. 취업을 준비하면서 질리도록 먹은 돈까스와 홍콩반점 짬뽕의 맛을. 생애 첫 해외여행을 가기 전 유니클로에서 5천원자리 티셔츠를 몇벌 사고 행복했던 기억은 경제가 만들어준, 평생 안고 가야 할 내 젊은 날의 초상들이다.
두 사람이 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 있다. 더운 날이었다. 개인적으로 노는 게 제일 좋다. 그 다음이 쉬지 않고 일하는 것. 제일 힘든게 적당히 쉬며 일하는 거다. 하드워커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비 내린 다음날, 내리쬐는 햇볕에 풀내음이 나면 꼭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0년전 군인 시절 여름철 주 과업은 예초였다. 자고나면 쑥쑥 자라는 잡초를 낫이나 예초기로 베어내는 일이다.
그날은 너무 더웠다. 전날 내린 비로 젖은 풀들이 마르며 내뿜는 습기는 지독했다. 지휘실에 더이상 못하겠다는 무전을 쳤다. 그랬더니 5분 일하고 5분 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지독한 사람들. 이 얼마나 달콤한 지시인가. 일한만큼 쉬라는데.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30분을 채 못넘겼다. 첫 5분 작업과 5분 휴식은 좋았지만 두번째 5분 작업은 1시간 같았다. 두번째 휴식 이후 다신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쉬다가 복귀했다.
계속 일하라고 했다면 아마 그것보단 많이 했을거다. 쉬었다가 다시 일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그때 명확히 깨달았다. 지금도 장기 휴식을 앞두면 다시 일할 걱정에 불안하다. 일하는 것보다 쉬는게 어렵다. 인턴 시절 존경하던 선배는 일하면서 쉬라고 했다. 집에 가선 다른 즐거운 일을 하라며 말이다. 몇년을 일해도 그게 참 어렵다.
휴가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자연의 섭리 같았다.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바다를 바라봤고 한라산에 올랐다. 섬에 들어가 지냈고 중국 자본이 건설한 거대 리조트에서 묵었다. 그 모든 추억이 노트북을 열자 나타난 하얀 창 위에서 일순간 사라졌다.
꽤 오래 잊지 못할 줄 알았지만 일상은 휴가를 다녀오기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서울은 여전히 삭막했고 각박했다. 밤늦게 당직을 마치고 걷던 종로 거리에는 주차 단속 요원들이 불법주차 딱지를 끊고 있었다. 열심히 취재해서 쓴 기사는 다음날 전부 조금씩 틀린 기사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출발은 커녕 지난 추억에 대한 아쉬움 뿐이었다.
파리를 여행할 때다. 리옹역 옆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앉은 사람은 담배를 피웠다. 불을 붙인지 1분이나 됐을까. 한 노숙인이 다가와 그에게 담배를 구걸했다. 그가 마지막 담배라고 하자 노숙인은 피우던 담배를 그대로 뺏어갔다. 대부분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파리의 삶도 그모양이다. 어딜가나 더럽고 치열하다.
한국의 지하철을 지옥철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지옥철은 파리 지하철이다. 개미굴처럼 복잡한 지하 통로를 따라 걷는 수많은 사람은 제각기 바쁘게 걷는다. 거기엔 스크린도어도 CCTV도 뭐도 없다. 집시, 노숙인, 소매치기가 판을 친다. 환승 게이트도 따로 없어 한번 갈아타려면 노선도를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
서울에서 살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파리를 떠올린다. 서울처럼 편의점 많고 대중교통 편한 도시가 어디 있을까. 더럽고 치열한 도시들도 다 살만하니 이렇게들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주말에 한강공원 피크닉을 가면 파리 시장이 휴가를 가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 니스에서 퍼온 모래를 센 강변에 깔아줬던 기억이 난다. 그 시장이 몇선을 했더라. 찾아보면 즐거움은 휴가가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있다.
이번 제주도에서의 추억은 오래 갈 거다. 지나간 날들이 아무리 아쉬워도 새로운 시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고 싶어 우는 아이는 없다. 박완서의 글이다.
사회부에서 정치부로 넘어온 지 만3개월을 채워간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정신은 아직도 몽롱하다. 옳고그름의 이분법적 세계에서 복마전이 판치는 다양성의 세계로 건너왔다. A와 B를 취재해 C를 쓴다.
한국 정치의 심장부인 국회의사당과 그 주변은 하나의 작은 사회다. 따듯한 봄날의 햇살이 비추던 날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직장인들은 분수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뒤 멀리 본관 계단에서는 코로나19 방역조치로 영업제한을 당한 자영업자들이 손실을 보상해달라며 피켓을 들고 소리쳤다. 꽃가루 흩날리는 거리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꾼들이 나팔을 불며 행진했다. 봄의 생동감이 그들에게도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젊은 연인들은 마스크를 쓴 채 서로를 쓰다듬었다. 기쁨과 좌절, 분노와 실망이 모두 이 작은 세상속에 산재돼 있다. 그것을 제때 포착해 세련되게 쓰지 못하는 나는 무력하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다. 정치의 정자도 모르던 내가 이 작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몸부딪혀 깨지며 새로 배운다. 그러기엔 지쳤고 노쇠했다. 이전에 배웠던 논리적추론과 증명이 들어맞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너졌다.
잘하려는 욕심과 잘해야한다는 책임감이 그렇지 못한 현실과 부딪힐 때마다 괴롭다. 어쩔수 없는 필연적인 시간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 작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그것부터 찾아 헤매여야겠다. 권력다툼, 패권싸움 그 너머에 있는 현상까지 도달하고 싶다. 내 시선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아, 젊은 날의 초상이여.
4주












